
일상의 리듬과 시의 운율을 맞출 줄 안다면 나는 어릴 때부터 거의 모든 이야기에 쉽게 감동받았다. 특히 막연하게나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처럼 방황하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에 감동받고는 했다. 이런 이야기에는 살던 곳을 박차고 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떤 영감과 깨달음을 얻고는 파도가 몰아치듯 글을 써내는 반항적인 주인공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스무 살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얻기만 하면 특별한 사람들과 특별한 사건을 겪으면서 번뜩이는 영감을 얻고 글을 막힘없이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어른이 되고 나서의 하루하루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여러 번 노트에다가 글을 끼적거리기는 했지만 물 속에서 뛰려고 할 때처럼 ..

| 독서 이력서 04 세상의 바깥에 서서 주먹을 휘두르는 도련님 소세키와 우리 사이 저 한 세기마저 통째로 베어내는 통렬함 세월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결코 매력을 잃지 않는 캐릭터들이 있다.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가 창조해낸 ‘도련님’, 아버지와 마주칠 때마다 “네 놈은 틀려먹었어!”라며 야단을 맞던 도련님도 씩씩대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100년이 흘렀건만 우리가 여전히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공이다.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가 시코쿠의 마쓰야마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1906년 ⌜호토토기스⌟에 연재했던 장편 소설로,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품이다. 소세키가 바라보던 근대 일본은 이미 역사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83637.html 한겨레 기사 추문과 혐오 너머의 보부아르(이다혜 기자) : 케이트 커크패트릭,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교양인, 2021년, 2만 2000원 핵심적인 문장/ 보부아르가 미성년자인 제자를 유혹한 일이나, 사르트르와 새로운 연인과 함께 세 사람이 맺는 관계를 여러 번 반복한 것이 ‘보부아르 되기’의 기획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상가이자 철학자로서의 보부아르에 집중할 법한 순간에 김을 빼는 데는 제격이다. … “여성이라는 조건에서 인간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책이 처음 간행된 1949년이 아니라 2021년에도 애석할 정도로 유효하다. … 보부아르는 남성 지배적인 프랑스..

몇 시인가요?;존 버거, 셀축 데미렐;열화당 집어든 이유/ 지난해 8월 한겨레 토요판에 실린 존 버거에 대한 기사(“나의 고향은 말이다”)를 읽은 적이 있다. 본인의 고향인 영국이 싫어 “나의 고향은 말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프랑스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는데, 지금은 귀해진 그런 종류의 사람 같아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국내에서 존 버거 책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는 열화당이라고 하길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존 버거를 검색했다.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워낙 대단한 작가일 것 같아서 가장 얇고 가장 잘 읽힐 것 같은 책으로 입문하기로 했다. 이 책 “몇 시인가요?”는 셀축 데미렐이라는 터키의 삽화가와 합심하여..

신극우주의의 양상;문학과지성사 '채석장' 시리즈 집어든 이유/ - 요즘 소설보다는 인문교양서에 더 관심이 많다. 특히 인문학을 깊이 탐구한 지성인들의 생각이나 녹취본을 활자화한 얇은 저서나 기록을 탐구하는 기록들을 많이 많이 모아서 읽고 싶은 욕심이 크다. 지난번 영풍문고를 들러서 인문교양서 서가를 둘러보다가 문학과지성사 로고가 책등에 찍힌 아주 얇은 책을 보았다. 아를레트 파르주의 ‘아카이브 취향’이었다. 유명한 역사서나 서구 지성사 등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그런지 이런 기록을 발굴해서 번역해 책을 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알고보니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는 각종 에세이나 작가들의 사유가 담긴 편지 등을 모아 발굴해내는 문학과지성사의 한 시리즈 ‘채석장’ 중 한 권이었다.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

| 독서 이력서 03 글쓰기와 그리기의 즐거운 공모 우리를 둘러싼 수없이 많은 종류의 시간에 대하여 “기억의 수명에 비하면 어떤 생도 기이할 만큼 짧다” 존 버거와 셀축 데미렐이 손을 잡았습니다. 영어로 글을 쓰는 이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비평가와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등이 사랑한 터키의 삽화가는 과연 어떤 공모를 벌인 걸까요. 2016년 이 두 사람은 각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시간’을 말하기로 합니다. 글이 그림을 이끌거나 그림이 글을 뒤따라가지 않고 ‘시간’이라는 평행선을 함께 걸어간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지켜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한 가지 구분법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바라보지만, 시간에는 사실 수없이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를 갑갑한 사무실..

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고 저자 소개 하재영은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 「달팽이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9년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젊은예술가지원금’ 대상자로 선정되며 주목받는 신인 작가로 떠올랐던 그는 2010년에 장편소설 『스캔들』을 출간했고, 이듬해인 2011년 단편소설집 『달팽이들』을 발표했다. 2013년부터는 동물단체 ‘팅커벨 프로젝트’에서 활동하면서 동물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간 학대당하는 개들을 쫓으며 한국의 동물 문제를 깊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그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다. 줄거리 소개 하재영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르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피피’라는 치와와를 우..

| 독서 이력서 02 "러시아 작가의 아주 짖궂은 농담" 이 짧은 소설은 불륜을 소재로 하지만 불륜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기 위해 쓴 책 따위가 아니다. 불륜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재일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항상, 어디서나, 누구와든 징글맞게 불륜 행각을 벌였다. 소설의 두 주인공 안나와 구로프처럼 우리 둘은 참 특별한 사람이고 우리의 사랑은 둘도 없을 갸륵한 사랑이라고 단단히 착각하면서. 그러나 책을 읽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두 사람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또 평범할 따름이고, 둘의 사랑은 모든 조건들이 우연히 맞아 떨어지면서 시작된 미친 우연일 따름이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두 연인은 이제껏 보여주었던 한심한 태도를 버리고 과감해지기만 한다면 행복에..

| 독서 이력서 01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개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두 권의 소설책을 발표한 뒤 한동안 소식이 없던 하재영 작가가 이번에는 르포로 돌아왔다. 바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생애를 추적하는 생동감 넘치는 르포로. 매우 사적인 계기로 개라는 동물을 신경쓰기 시작한 그는 차차 자신의 반려견 ‘피피’에서 한국의 개들로 시선을 넓힌다. 한국의 개를 추적하는 여정을 떠나기 전에 그는 먼저 묻는다. 한국에서 동물권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답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이다. 개를 해치면 동물보호법이 아니라 개 주인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는 나라에서 개는 여전히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인 동시에 보신용 식료품으로서 유통..

기 드 모파상, 어떤 정염, 펭귄클래식코리아, 2018. 집어든 이유/ 영풍문고에 들러 문학 전집을 진열한 서가를 보는데 익숙한 펭귄 출판사의 펭귄 로고가 보였다.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출판사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지만 예전에 ‘제인 에어’와 ‘자기만의 방’을 펭귄 번역본으로 읽은 적이 있어서 펭귄에서 책을 냈다 하면 믿음이 간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사랑을 주제로 한 모파상의 단편을 묶어낸 ‘어떤 정염’은 펭귄에서 특별히 기획한 중 한 권이라고 한다. 펭귄에서 출간한 다른 시리즈처럼 이 책도 펭귄 출판사에서 냈음을 강조한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 포맷을 가지고 있다. 기획 의도가 인상 깊은 시리즈라 나중에 모으게 될 지도 모를 전집이라고 여겨서 구매했다. - 구성에 대해/ 성과 사랑의 복잡다단한 ..